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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바다의 전설 16회.170111



# 프롤로그

매점까지 혼자가는 건 어쩐지 항상 쓸쓸하다. 혼자라는 개념이 꼭 그렇진 않겠지만, 유독 매점까지 이어지는 복도는 사람을 더욱 더 외롭고 지치게 만든다. 그래도 돌아올 땐 가슴팍과 바지 주머니 안에 빵이며 음료수며, 이것저것 간식거리들이 그득히 담겨 있을테니 덜 외로울 테지만.

“소보로빵이랑, 소시지빵, 그리고 슈크림빵.. 또.....”

묵묵히 나의 주문을 받는 매점 아주머니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익숙한 메뉴들을 토해낸다. 세상을 둘러보면 시간도 변하고, 공간도 변하고, 뭐 이것저것 변하는것 투성이지만, ‘그녀석’들의 입맛만큼은 늘 변함없이 한결 같다는게 신기하다면 신기하다. 1년넘게 ‘이 짓‘을 하면서 이젠 익숙해졌다면 익숙해졌을 정도다.

바지주머니가 두툼하게 부풀어 오른것도 모자라, 양손에 빵빵한 비닐봉투를 들고 교실까지 걸어가자니, 흡사 삐에로나 혹은 이와 같은류의 광대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뭐 역할은 다를테지만, 나도 광대라면 광대일테지. 완선이 누나가 소싯적에 얘기해준대로, 나도 ‘너흴’ 보고 웃어줄까?

같은반에서 끝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일부 ‘아이들’은 나를 일방적으로 ‘왕따’로 규정하고 있다. 헌데, 나는 여기엔 조금 불만이 있다. 그러니까 뭐, 나를 ‘왕따’로 규정하는건 어디까지나 좋다. 다만, 나는 일반적인 왕따의 범주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스스로 규정하기에, 왕따에는 3가지 부류가 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사람이 ‘왕따를 당하는’ 이유에는 크게 3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몸이나 정신 자체가 허약하고 비리비리해서, 대놓고 괴롭힘을 당하는 부류. 가장 일반적인 형태라고 해도 좋다. 두 번째는 지 잘났다고 설치다가 ‘재수없어서’ 왕따 당하는 유형. 솔직히 왕따 당해도 싼 부류다. 그리고 내가 속한 마지막 3번째 부류는, ‘사람이 좋아서’, 혹은 ‘천성이 착해서’ 어쩔 수 없이 왕따를 당하는 부류다. 그러니까 나는 왕따라기 보단, 친구들을 위해 ‘희생’하는 쪽에 가깝다. 멀리 갈 이유도 없이, 지금 내 몸 여기저기에 담겨 있는 간식거리만 놓고 봐도 그렇다. 일반적인 형태의 왕따들은 주로 이런 간식거리를 자비로 소진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일단 내 역할은 어디까지나 ‘심부름’이다. 고로 내 돈이 빠져나가는 일은 결코 없다. 따라서 나는 왕따를 당하고 있는게 아니라, 친구들을 위해, 친구들의 귀찮음을 대신해서, ‘희생’하고 있는 것 뿐이다.

“후우. 인호 왔네. 오늘도 알아서 잘 사왔지? ”
-어.. 뭐.. 그렇지.
“인호는 역시 똑똑하단 말야!! 고마워!!”
-응..
“아참 인호야!!”

바지에서 주섬주섬 간식거리를 내어놓고, ‘친구’ 녀석들에게 구색 좋은 말을 듣고 서 있기가 낯간지러워서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돌려 세웠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수혁이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역시 친구란 좋은거지? 큭.”

친구라. 나한테 그런게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나와는 동떨어진 개념이건만. 그래도 하루의 반 이상을 보내는 학교에서 나를 친구라고 불러주는 녀석은 저 녀석 하나 뿐이리라.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자리로 돌아가는데 다시금 귓전으로 수혁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맙고, 이따가 저녁이랑, 내일 점심도 부탁해!!!”

항상 이런식이긴 하지만.


# 스마트포온!

부질없는 오후 수업이 계속되고 있다. 여름이라는 날씨탓에 한창 더울때라, 교실안에 앉아있는 내 또래 아이들은 수업따위 진작부터 관심에 없는듯 보인다. 솔직히 나 역시 공부에 관심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비겁하게 날씨따위에 변명을 기댈 생각은 추호도 않다. 그냥 공부에 관심이 없다. 다만 신기하게도 시험만 치면 상위권에 성적이 랭크되어, 늘상 그저 그렇게 ‘손쉽게’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재수없다면 미안하지만, 솔직히 나도 이유를 모르겠다. 시험문제지에서는 늘상 그냥 당연한 얘기들을 묻고 있고, 나는 언제나 그 당연한 얘기들에 맞서 당연한 말들을 쏟아내면 그만이다. 언젠가 재미있게 봤던 일본드라마 ‘백야행’에서 여주가 쏟아냈던 ‘우리같은 사회적 소약자가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 라는 한마디의 대사가, 은연중에 내 뇌리에 다가와 박혀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지금의 나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과연 공부끝에 ‘길’이 있을까 싶은 의문이 간간히 들곤 한다.


“야 서현진 서현진!! 오늘 졸라 짧은 치마 입고 왔대!!”
-서현진이면, 이번에 새로 온 교생?
“그래 임마. 바로 다음 교시에 수업인데, 졸라 기대된다. 야 빨리 맛폰 꺼내 맛폰!”
-교생은 교생이네. 요새 여자 선생님들 학교에 치마 잘 안 입고 오는데. 후우. 아 씨파 벌써부터 흥분된다.

쉬는시간에 책상에 앉아 멀뚱멀뚱 앞만 보고 있노라니, 실험실의 개구리마냥 책상위에 늘어져있던 녀석들의 눈에 돌연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아 불쌍한 청춘들이여. 말랑말랑한 계곡을 덮고 있는 ‘장막’ 따위에 그렇게 환호 하다니. 이해가 되질 않는다. 어찌되었든, 버릇없이 녀석들이 ‘서현진’이라고 쉴새없이 부르고 있는 교생 선생님의 수업시간이 되었고, 녀석들은 숨을 죽이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 모습이 결연한 의지에 차서는 전투태세에 돌입하는 ‘병사’와 다를바 없어 보였다.

“드르륵”

여기저기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불쌍한 청춘들이여. 동시에 문이 조금 열리는가 싶더니, 정말이지 ‘뽀얀’ 살결의 다리 하나가 -영원히 금녀(禁女)의 구역일것 같은 남학생 투성이의- 교실에 터억하고 들어오고 있는게 보였다. 뽀얀 형체가 문을 완전히 빠져나와 또깍또깍 소리와 함께 교단까지 걸어간다. 적당한 길이로 발뒤꿈치 아래에 뻗어있는 검은색 하이힐과, 근육이라곤 좀체 찾을 수 없는 얄쌍한 다리라인, 그리고 허벅지를 아슬아슬하게 휘감고 있는 타이트한 정장치마와 덕분에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히프, 그리고 하얀색 블라우스가 꼬옥 감싸쥐고 있는 적당한 크기의 가슴과 하얀 목선, 그리고 대미를 장식하는 하얀 얼굴과 고른 치열까지. 이쯤되니 -우습게도- 나까지 덩달아 가슴이 떨려오기 시작한다. 결국은 나도 수컷일 뿐이구나.

그렇게 수업이 시작되었다. 신기하게도 -아니면 당연하게도- 방금전까지 책상위에 뻗어있던 녀석들의 모습을, 지금 이 순간엔 결단코 볼 수 없다. 모두들 눈이 또랑또랑 해 져서는, 하나같이 책상아래로 스마트폰을 만져대고 있다. 기술과 과학의 발전이, 누군가에게는 이런 식의 ‘아픔’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뒷맛이 씁쓸해진다.

“그럼, 날 더우니까, 오늘은 수업 조금 일찍 끝낼까?”

아이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교생의 이 한마디는 차라리 ‘사형선고’나 진배없는 분위기다. 생긋 웃는 교생의 말 한마디에, 아이들이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그러자, 내 옆자리에 앉은 -잔득 상기된 표정의- 녀석 하나가 갑자기 손을 들더니 교생을 향해 소리쳤다.

“선생님!! 저 이 문제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저기서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쩐지 나도 조금은 미간을 찌푸리게 됐다. 너무 ‘올드한‘ 방식이다. 이건 차라리 대놓고 ’팬티좀 보여주세요!‘ 하는거랑 다를게 없다. 게다가 어미에 붙은 저 ’만‘ 은 무어란 말인가? 이 문제 모르겠습니다만? 아 괜시리 안타깝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분이 계신’ 하늘은, 우리들의 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 만큼은.

“그래? 수업일찍 끝낸다고 했으니, 할 수 없지. 가르쳐 줄게. 뭔데?”

착한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선생님은 ‘나름 머리를 쓴’ 옆자리의 녀석을 향해 조심스럽게 걸어오고 있었다. 떨리는 심장을 움켜쥐고 교생 선생님이 다가오는 모습을 찬찬히 &#55133었다. 아니나 다를까, 홍해를 가르듯 교실을 가로질러 다가오는 선생님의 뒤로, 잔득 상기된 표정의 아이들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해 하나같이 꽃혀 있는게 보였다. 가지런한 걸음걸이로 바로 내 옆에 다가와 나를 등지고 고개를 숙이는 교생 선생님을 슬그머니 바라보자, 정말이지 타이트한 스커트 자락과, 그 위로 뻗은 허벅지를 ‘무방비’하게 내보이고 있다. 본의 아니게, 나의 고추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결국 나도...

선생님을 바로 옆에서 등지고 있는 나는 정말이지 미칠 지경이었다. 슬쩍 주위를 살펴보니, 내 주위에 있는 녀석들도 안절부절 못하기는 마찬가지인듯 보였다. 땀이 가득 찬 손에, 하나같이 스마트폰을 꼬옥 쥐고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앉아 있는 꼴이라니. 하지만, 최소한 지금 상황에선 내가 ‘그들‘을 탓할 ’자격‘따윈 없다. 청춘이란 쓰라린 거구나.

“인호야. 찍어. 니가 자리가 제일 좋잖아.”

뒷자리에서 누가 나를 쿡쿡 찌르며 말을 걸어오기에 놀라서 돌아보니, 뒷자리에 앉아있는 수혁이가 베시시 웃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장난이겠지 싶은 생각에, 멀뚱멀뚱 있으려니까 수혁이 옆에 앉아있는 진수가 얼굴 표정을 구기며 나를 향해 턱을 한번 튕겨내는게 보였다. 더 이상 기다려주지 못하겠다는 뜻의 신호라면 신호일테지. 나는 어쩔 수 없이 바지 주머니에서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처럼 보이는 ‘쌍팔년도 슬라이드폰’ 을 꺼내들었다. 그러자 그걸 바라보고 있던 수혁이가 헛기침을 한번 하는가 싶더니, 나에게 자신의 최신 스마트폰을 건내줬다. 액정화면을 바라보니 이미 빨간 REC 버튼이 켜진 상태였다.

“인호야. 우린 ‘친구’지? 큭. 빨리. 빨리.”

수혁이 녀석이 내뱉은 ‘친구’라는 말에 옴짝달싹 못하게 되어버렸다. 슬쩍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니, 반 아이들의 표정또한 좋지 않다. 더 이상 지체했다간 하늘이 허락한 ‘엄청난 기회’가 다시금 하늘로 날아가 버릴지 모른다는 표정들이다. 이쯤대면 방법이 없다. 나는 수혁이의 휴대폰 액정의 ‘REC’ 버튼을 꾸욱 누른채 천천히 자세를 고쳐잡고 교생선생님의 검은색 스커트 자락 안으로 폰을 서서히 집어 넣었다. 아 그런데, 젠장.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거지?

아이들은 이미 숨을 죽인채 내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있었다. 내 손에 들린 스마트폰이 교생 선생님의 -스마트폰이 들어갈 만큼의 공간을 허락해준- 두 다리 사이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교실안에 울려퍼지는건, 질문을 한 아이의 건성건성한 대답과 정말이지 정성스럽게 설명을 하고 있는 교생 선생님의 듣기좋은 목소리 뿐이었다. 다만, 어쩐일인지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버린 나의 귓전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이 ‘경건한 의식‘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빌고 또 빌 뿐이었다. 아주 간절히.

[스윽]

수혁이의 휴대폰 카메라가 가녀린 교생선생님의 두 다리로 기어이 들어가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괜시리 내가 뭐라도 된것마냥 공중에 붕뜬 기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가슴이 떨린다. 쉬이 진정이 되질 않는다. 카메라에 담길 교생선생님의 ‘은밀한 곳’이 궁금하면서도 -나도 어쩔수 없는 남자라- 혹여라도 들킬까 하는 마음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정말이지 1분같은, 아니 1시간같은 1초가 지나가고 또 지나갔다. 그런데...

“앗!!”

그러니까 생각해보건데, 신이라는 양반은 항상 이런식이다. 늘 불공평하고 불합리하게 행동하면서, 늘상 자신은 ‘공평하다’고 자기 변호를 늘어놓곤 한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이 ‘숭고한 의식’을 완벽하게 끝마칠 수 있게끔 도와주는가 싶더니, 기어이 내 손을 ‘툭툭’ 쳐내서는 교생선생님의 두 다리에 다가가 부딪히게 만들어 버린다.


“너.. 너 지금 이게 무슨?”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고 숨을 죽이며 이 광경을 지켜보던 ‘녀석들’이 쏜살같이 자리에 자세를 고치고 앉는게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당황했던지, 교생선생님의 다리 아래에서 스마트폰을 미쳐 빼낼 생각도 하지 못한 나는 그대로 교생선생님과 마주한채 자리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기분탓인지 뒷자리에 앉은 수혁이와 진수가 키득대고 있는것 같았다. 느낌탓이겠지. 우린 ‘친구’인데.






# 친구

수혁이가 부탁한 ‘다리 아래에서 벌어진 숭고한 의식’ 덕분에, 나는 벌써 몇시간째 교무실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중이다. 교실에서는 나름 침착하려 애쓰던 모습의 교생선생님은, 막상 나를 끌고 들어온 교무실에서는 쉬이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계셨다. 정말이지 수치스러워서 땅에 고개를 파묻은채 말없이 교생 선생님의 화를 받아내고 있자니, 간간히 다른 선생님들이 혀를 끌끌 차며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그 순간만큼은 죽고 싶을정도였지만 그나마, 교감선생님과 몇몇 선생님들이 나서서 내 변호를 해 주신 덕분에 좀체 진정되지 않을것 같던 교생선생님의 화는 겨우겨우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묵묵히 있노라니, ‘의외라느니’, ‘인호는 성적이 좋아서 저런짓은 안할것 같았는데’ 따위의 말들이 귓전을 때렸다. 정말이지 이 사회는 이상한게, 거의 모든게 성적과 결부되어 있다. ‘이런짓’을 하는 학생 혹은 사람은 또 따로 정해져 있단 말인가? 그리고 성적이 좋으면 이런짓을 하지 않는게 당연한 일일까? 도무지 논리적으로 맥이 닿지 않는 말씀들을 나로썬 그냥 꾸역꾸역 듣고 있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차츰차츰 안정을 되찾음과 동시에- 아까 수혁이 내뱉었던 ‘친구’라는 말을 몇 번이고 곱씹어 보았다.

저린 다리를 절룩거리며 교무실 문 밖을 나선건, 오후 7시 쯤이었다. 교생선생님께 몇 번이고 죄송하다며 고개를 조아리고, 그것도 모자라 반성문을 5장이나 써 내고 난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평소에 나를 특별히 예뻐해 주시던 -뭐, 이것도 성적에 기인한- 물리 선생님이 교생선생님 곁에 바짝 붙어서서는 ‘원래 그런애가 아닌데, 호기심에 그랬나보다, 이해해 줘라’ 라며 교생선생님의 손이며 팔이며 등이며 할 것 없이 쓰다듬는게 조금 보기 불편했지만.
다리에 전기가 관통하듯 지릿한 다리를 끌며 교문밖을 나섰다. 여름이라 낮이 길어진탓에, 이제야 석양이 조금씩 드리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괜한생각‘에 손을 바지춤에 꾸욱 찔러넣고선 ’무언가‘를 확인하려 노력했다. 그 때였다.

“인호야!!”

기다리고 있었던건지 어쨌던 건지, 저~기서 수혁이가 다가왔다. 어색하게 인사를 받았다. 동시에 ‘친구’라는 한 단어가 떠올라, 살짝 미소를 머금고 말았다.

“내 스마트폰 뺏겼어?”

그러면 그렇지. 친구는 무슨. 결국 걱정되는건 내가 아닌, 자신의 스마트폰이었으리라. 내가 무슨 큰 죄라도 지은양, 고개를 천천히 위아래로 흔들자, 수혁이 표정이 잠깐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건 그거고, 혹시 말야. 그 스마트폰은 누구건지 따로 말 안했지?”

뭐, 어찌되었든 그것도 궁금했다면 궁금했겠지. 나는 다시금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며, 눈앞의 상대가 듣길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됐는지, 수혁이는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생긋 웃어보였다.

“역시, 친구밖에 없네. 그나저나 아쉽다. 나도 조금은 보고 싶었는데, 교생 거기.”
-저. 그거라면....
“음?”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수혁이를 올려다보며 내가 무언가를 말하려 하자, 수혁이가 의아한듯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 보았다. 나는 바지춤에 손을 슬쩍 집어 넣어, 검고 작은 ‘마이크로 sd카드’ 하나를 손가락으로 집어 수혁이에게 건내 주었다.

“이게 뭔데?”
-아까 찍은거. 선생님몰래 내 휴대폰에 있던 거랑 바꿨어.
“앙? 우와. 쩐다~! 역시 공부잘하는 놈들은 잔머리도 좋구나? 그런데 선생님 아시면 어쩌려고”
-선생님한텐 그냥 둘러대면 돼. 사실 찍으려고 했는데, 잘 안되서 못찍었다고.

환호성을 지르며 포효하는 수혁이를 바라보니, 어쩐지 괜히 기분이 뿌듯해졌다.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수혁이가 인사도 없이 쏜살같이 내빼기에 그마저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여전히 노을빛 하늘이 아름답다.


# 누나! 누나!! 누나!!!!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노랑빛 하늘을 따라 걸었다. 하릴없이 가슴깊이 저녁공기를 가슴속 깊은 곳까지 한가득 쓸어 담았다. 역시나 좋다. 누군가는 아침공기가 가장 신선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이 시간대의 공기가 그렇게 맛있고 느낌이 좋을수가 없다. 뭔가 포근한 느낌이다.

한참을 걸어가니, 낡은 철길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동네가 거의 시골이나 다름없는데다가, 또한 -재개발 소문만 무성할뿐- 완전히 ‘후지다’ 보니, 이런 철길도 턱하니 아직까지 남아있다. 더 놀라운건 아직도 이 철길위에 열차가 다닌다는 거다. 꽤나 길게 뻗어있는 기찻길을 따라 걷다보면 틈새틈새 갈라진곳도 적지 않은데, 이런 철로위를 아직도 열차가 달린다는 생각에 기가찰 노릇이다. 후우. 왠 걱정? 교생선생님 팬티나 훔쳐보다 걸린 주제에 누굴 걱정하고 있담. 그냥 걷자. 그리고 또 걷자.

땀이 흐르는지 어떤지도 모른채, 20분을 걷고 또 걸었다. 저녁이 되면 조금 선선해 질줄 알았는데, 이 날씨는 낮 저녁 가리지 않고 덥다. 지구 멸망의 해라는데, 슬슬 그 징조가 발현되는건지도 모르겠다.
허리를 굽힌채 꽤나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익숙한 건물앞에 멈춰섰다. 땀인지 물인지 모를 지릿한 액체를 이마위에서 걷어내며, 미간을 찌푸린채 건물앞에 내걸린 글자를 하나하나 훔쳐본다.

‘xx 도서관’

다른것보다도, 도서관이라는 글자 3개에서 나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말이 좋아 도서관이지, 차라리 여긴 공부방에 가깝다. 뭐, 생긴지는 얼마 되지 않아 건물은 제법 괜찮은 편인데, 멀리 도시에 있는 -언젠가 TV에서 봤었던- 시립, 혹은 공립 도서관과 비교하면 정말이지 볼품이 없을 정도다. 그래도 이런 촌동네에 이런 ‘문화시설’이 있다는건 차라리 기적에 가깝다. 나는 투정부리는걸 그만두기로 하고 천천히 도서관 안으로 발을 들였다. 어찌되었든, 하루의 또다른 일과처럼 내가 이곳을 찾는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으니까.

도서관은 1층 자료실과, 2층의 열람실로 나뉘어져 있었다. 말이좋아 자료실이고 열람실이지, 사실 자료실에 구비되어 있는 장서가 몇 권 되지 않아 지시 푯말을 서로 바꾸어 달아놓아도 큰 지장이 없을정도다. 자료실 앞에 다다른 나는, 그제야 이마와 얼굴가득 흐르고 있는 땀에 흠칫 놀라며, 서둘러 화장실로 달려갔다.

시원하게 세수를 한번 하고선, 휴지를 한 웅큼 뜯어내어 얼굴 이곳저곳을 닦고 또 닦았다. 그리곤 오른손을 가지런히 모아 거울을 보며 머리를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그렇게 몇 분 동안 정리를 하니, 제법 ‘사람티’가 난다. 만족스러움에 헛기침을 한번 하고선 다시 천천히 자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둑고양이처럼 슬금슬금 자료실 문 앞으로 다가가서 유리문에 바짝 기대어 섰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유리문에 두손을 ‘아치형’으로 모아 가져다 댄채 얼굴을 들이밀고 안을 살폈다. 한눈에 보기에도 한적해 보이는 자료실 안에 익숙한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아래까지 곧게 뻗어있는 생머리는 이마를 가린듯 가리지 않은듯 살포시 가리마를 내어 보기좋게 정돈되어 있다. 그리고 교생선생님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딱히 앙금이 남아있다거나 해서 이러는건 아니다- 뽀얗고 하얀 얼굴피부가 가뜩이나 선이 여리여리하게 고운 얼굴을 더욱더 예쁘게 보이게끔 만든다. 오똑하게 솟아있는 코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눈썹, 그리고 작은 얼굴에 여기저기 보기좋게 자리잡고 앉아있는 코와 입까지. 과연 인간의 형상이 맞을까 싶은 모습에 한동안 넋을 빼앗기고 바라보고 있었다.

“어?”

한참을 유리문에 기대어 넋놓고 있노라니, ‘훔쳐봄의 대상’이 나를 발견하고선 화들짝 놀랜다. 내가 놀라기는 커녕, 애려 웃어보이려니까, 그제서야 자료실에 반듯하게 앉아있던 ‘천사의 형체’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내게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게 보였다. 그림처럼 예쁜 얼굴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는데, 인간의 몸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 역시 눈앞의 형체에 알알이 다가가 박혀있는 느낌이다.

“이제 오는거야? 또 걸어왔구나?”
-응. 그게 더 편하니까. ‘누나‘
“덥지? 마실거 줄까?”

나는 그렇게 ‘누나’의 손에 이끌려 자료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자료실안에 켜져있는 에어콘 탓도 있겠지만, 어쩐지 좀전과는 다르게 더위를 느낄 수가 없다. 그래 천국이 있다면 여기겠지.

자료실이 문을 닫는 10시까지 나는 누나곁에서 이런저런 책을 읽었다. 재미있는건, 학교에서 보내는 장시간의 시간들보다, 이렇게 누나 곁에 앉아있는 두세시간 남짓한 시간에 집중이 더 잘된다는 사실이다.
2층에만 불이 켜져 있는 도서관을 뒤로하고, 누나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도서관 앞에서 결국 참지 못하고 나는 습관처럼 누나의 큼지막한 가슴으로 몸을 맡겼다.

“아이참, 얘가 또..”
-아.. 누나...

불과 5년전만 해도 나보다 훨씬 커보였던 누나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버린 지금에 와서는 어쩐지 그때보단 조금 작아진 느낌이다. 아니다, 내가 커버린 걸까? 하는 수 없이 허리를 한껏 구부리고 그대로 가슴속에 파묻히니, 누나도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냥 웃고 만다.

이 세상 누구와 견주어도 결코 뒤짐이 없는 우리누나는 나와 7살 터울이다. 나이차이가 상대적으로 많이 나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릴적부터 누나는 나를 ‘엄마처럼’ 잘 챙겨주었다. 사실 그도 그런게, 엄마가, 나를 낳고 얼마 있지 않아 집을 나간 덕분에, 환경이랄까? 그런게 그렇게 됐던것 같다. 이를테면 누나가 조금 일찍부터 어른스러워질 수 밖에 없었던. 그리고 돌이켜보면 딱히 좋은 동생까지는 아니었더라도, 나도 그닥 별로 사고는 치지 않았던 것 같다. 가끔 화 한번 내지 않는 누나를 보고 있노라면, 답답하기 보다는 어쩐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하긴 저런 얼굴에 화가 드리우는건 좀체 상상할 수 없는 노릇이긴 하다.

누나와 내가 ‘아버지가 다르다’는 사실은 1년 전쯤에 알았다. 정말이지 우연찮게도 남의 얘기 하기 좋아하시는 동네 아주머니 몇분이 하시는 얘기를 듣다가 그렇게 되버렸다. 재미있는건,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놀라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 평소에 조금 이상하다 생각하긴 했다. 아무리 뜯어봐도 닮은곳이 한군데도 없다는게, 말이 되나 싶었다. 되려 그쯤되니 어쩐지 속이 좀 뻥뚫리듯 시원한 느낌도 적지 않았다. 뭐 그럼 그렇지. 뭐 이런 류의 느낌.

“그나저나, 오늘은 학교에서 별일 없었어?”
-아.. 뭐...

‘친구’가 시켜서 예쁜 -물론 누나보다 못하지만- 교생선생님 치맛자락에다가 스마트폰을 밀어넣었다가 걸렸어요. 라는 말은 곧 죽어도 할 수 없다. 그냥 얼버무리며 대충 둘러댔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다.

“후우. 우리 인호가 빨리 친구들좀 많이 사겨야 하는데”

친구? 있긴 있어. 그런데 나한테 친절하게 그 스마트폰을 빌려주고 선생님 거기를 ‘찍으라’고 한게 하필이면 그 ‘친구’야. 라는 말은 역시나 곧 죽어도 할 수 없다. 역시나 내가 할 수 있는건, ‘친구 많아. 걱정하지마’ 따위의 얼버무림 뿐이다.

누나와 밤공기를 맞으며 집까지 터벅터벅 걸어갔다. 기분탓인지 오늘따라 밤하늘에 별이 많다. 앞으로 걸으며 시선을 하늘쪽에 고정하다가 슬쩍 누나를 바라보니, 누나도 어느샌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누나를 히죽거리며 훔쳐봤다. 예쁘고. 예쁘며. 또 예쁘다. 학교에서 무슨일이 벌어졌든, 지금 이 순간만큼은 행복 그 자체다.


# 안좋은 일은 꼭 쌍으로 오더라?!

겨우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누나가 도서관 사선인 탓에, 등교시간은 늘 누나와 함께 한다. 얘기를 들어보니, 규모가 좀 큰 도서관은 사람 몇 명이서 로테이션으로 근무를 한다고 하는데, 누나가 일하는 도서관은 규모가 작아서인지 몰라도 혼자서 모든 업무를 처리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불평불만따윈 쏟아내지 않는걸 보면, 새삼 누나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누나와 어디쯤에서 헤어지고, 나는 학교로 향했다. 뭐 어찌되었든 ‘왕따’긴 하지만, 딱히 학교가는게 두렵거나 하진 않다. 에려 학교 성적이 우수한 탓에 최소한 선생님들한테는 인식이 꽤 좋은 그룹에 속하는 터라, 나름 예쁨도 많이 받고 있다. -그럼에도 왜 반친구들한텐 그렇게 외면당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당연히 구타를 당한다거나 돈을 뜯기는 일도 거의 없다. 그저 내 역할은, 점심이나 저녁시간에 매점심부름 -물론 내 돈은 안나간다. 이게 중요한거다. -을 하거나, 그냥 소일거리를 도맡아 하는 것 뿐이다. 그냥 ‘희생’이다 희생. 하지만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오늘은 왠지 발걸음이 무겁다. 그러면서 교생선생님과 마주치거나 하진 않을까 하면서 주위를 살폈다.


교실에 들어서니 반 아이들이 교실 한쪽에 그룹을 지어 뭉쳐있는게 보였다. 무슨일인가 싶었지만,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하지만 딱 보기에도 애들이 뭉쳐있는곳이 내 자리 주변이었기에 -정확히 얘기하면 내 뒤에 앉아있는 수혁이 자리였기에-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채 멀뚱멀뚱 서 있으려니 간간히 ‘우와’ 하는 탄식과 ‘쩐다’ 같은 류의 짤막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쯤되니 조금 호기심이 발동해서 고개를 슬쩍 들이밀려 하니, 애들에게 둘러 쌓여 있던 수혁이가 나를 발견하고는 먼저 인사를 걸어왔다. 당황해서 인사를 받아내니, 정말이지 거짓말처럼 수혁이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마치 벌레라도 본 양- 부랴부랴 흩어지고 있는게 보였다. 머쓱해 져서 그제야 내 자리를 찾아 앉으려니까, 수혁이가 나에게 누구의 것인지 모를 스마트폰 하나를 툭 하고 던져줬다.

“덕분에, 좋은 구경했다. 너도 한반 봐~”

좋은 구경이라. 그 정도 눈치는 있다. 정황상 어제 내가 찍은 동영상을 돌려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애초부터 관심도 없었던 지라, 거부할까 생각하다가 수혁이 눈치가 보여 -수혁이도 수혁이지만, 그옆에 앉아있는 진수녀석 표정이 사실 더 무서웠다- 가방을 슬쩍 내려놓음과 동시에 스마트폰을 받아들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볼륨 버튼을 누를 새도 없이, 커다란 잡음과 함께 영상이 재생되었다. 화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검정스커트자락과, 그 안에 빵빵하게 잠들어 있는 엉덩이가 대뜸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괜시리 두 볼이 빨개져, 재생시간을 슬쩍 바라보니 1분 4초다. 맙소사. 어제 내가 무슨짓을 했단 말인가?

동영상은 조금씩 흔들리는가 싶더니 차츰차츰 구도가 변해가고 있었다. 낡은 텔레비전처럼 파르르 떨리는 영상으로 말미암아 내가 어제 결단코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다는 걸 되새길 수 있었다. 그냥 체념하고 뽀얀 다리 사이로 과감히, 하지만 천천히 들어가는 영상에 집중했다. 그리곤 얼마가지 않아 방금전 아이들이 -추측컨대- 탄식과 감탄사를 내던졌을 그 부분에서 카메라가 조금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이게 뭐지?’

솔직히 조금 생경하다. 여자 팬티야, 중학교때 -정말이지, 호기심으로- 누나가 입고 있던 팬티를 몇 번 보기는 했다. 하지만 어쩐지 동영상에서 재생되는 건, 그러니까 교생선생님이 어제 입으셨던 팬티는 내가 알고 있던거랑 조금 ‘달랐다’. 친절히도 반아이중 누군가가 ‘아무리 그래도 교사가 티팬티는 좀 아니지 않냐?’ 라고 떠드는 탓에, 그 요상한 것의 이름이 ‘티팬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티팬티. 티팬티.

1분남짓한 동영상을 끝까지 봤다. 티팬티의 임팩트가 나름 컸는지, 머릿속에서 엉덩이 사이에 얄쌍하게 껴 있는 검은색 -사실 그마저도 확실하지 않다. 하얀색이었는지 어땠는지- 티팬티가 지워지지 않았다. 그저 고추가 얼얼할 정도로 발기해 있기에 등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애써 무시하며 손에 들린 스마트폰을 다시 수혁이에게 건내주려는데, 그제서야 뭔가 낌새가 이상한것을 알아채고 천천히 고개를 올려 들었다.

[짜악!!!]

뭐지? 눈물이 핑돌고 뺨이 얼얼하다. 당황한듯, 아니 흥미롭다는 듯 나를 쳐다보고 있는 수혁이와 진수를 뒤로하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변태자식. 어제 그렇게 알아듣게 말을 했는데...”

언제 와 계셨는지, 교생선생님이 거의 울먹이며 나를 노려보고 계셨다. 뭔가 억울한 상황이라, 자기변호라도 할 생각이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바지’ 차림으로 ‘따라와’를 연발하시는 선생님을 따라 나는 교무실로 향했다. 기분이 어질해서 나를 보며 숙덕이거나 히죽히죽 웃어대는 반친구 녀석들을 알아보는 것도 힘들었다.


어제에 거의 몇 배에 해당하는 시간을, 아니 차라리 하루종일이라는 시간을 교무실에서 보냈다. 일이 이렇게 번지니, 어제는 그래도 나를 보호해주시던 선생님들마저 묵묵하게 자기 위치를 지키셨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선생님들끼리 부모님을 모셔오게 해야하나 마나 하는걸로 이야기를 나누시는게 들렸다. 괜히 지레 겁을 훔쳐 먹은 탓에, ‘쟤 아빠 엄마 없잖아?’ 같은 말이 -다행히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나는 혹여라도 누나가 학교에 오게될까 싶은 생각에, 제발 그 따위의 ‘최악의 상황’만큼은 오게 하지 말아달라고 누군가에게 빌고 또 빌었다.

다행히도 사건은, 내가 다시금 마이크로 SD카드를 반납하고, 반성문을 10장넘게 쓰는걸로 일단락 되었다. 꽤나 분하셨는지, 기어이 교생선생님이 눈물을 보인탓에 -어찌되었든 원인을 제공한 사람으로써-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말이지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 또 한 후에야, 이번에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물리 선생님이 교생선생님을 다독이며 여기저기를 스다듬는것을 바라보며 교무실을 나설 수 있었다.

하루를 죄인처럼 교무실에 갇혀 있었더니, 머리가 핑 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교문밖을 나서며 주위를 살폈지만 수혁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뭐 어제 확인한 바에야, 재차 확인할 필요는 없겠다 싶었을까? 아마도 자신에 대한 나의 ‘충성심’ 따위를 신뢰하고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몸이 천근만근이 되어서는 걷고 또 걸어 도서관에 도착했다. 그나마 학교에 누나가 불려오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바보같은 생각과 동시에, 어쩐지 누나 얼굴 볼 면목이 없다는 생각에 도서관 정문 앞에서 주춤거리고 서 있었다. 대관절 이틀동안 내가 무슨짓을 한거지?

쭈뼛거리며 1층 자료실문 앞에 가서 섰다. 정말이지 쉬이 들어갈 용기가 나질 않아 쭈뼛거리다가, 나름 용기란걸 내서 천천히 문을 열었다.

“어~ 우리 동생 왔네? 많이 덥지?”
-아니 뭐 그냥.
“일로와, 시원한거 줄게. 어 근데 얼굴이 좀..”

아차. 다른 생각하면서 들어올걸. 괜시리 표정에 들어났나 보다. 누나가 어딘지 걱정이 된다는 표정으로 내 한쪽 뺨을 쓰다듬으려 하자, 나는 얼굴이 붉어져서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제야 아침에 교생선생님께서 내 뺨을 후려갈겼던 사실이 떠올랐다.

“별일 아니야. 것보다 나 시원한것좀 줘 누나”

애써 얼버무리며 나는 일부러 누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누나가 여전히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나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한동안을 그렇게 묵묵히 책만 읽었다. 평소같았으면 가끔씩 고개를 들어 누나의 표정을 살피거나 했을텐데, 오늘은 혹여라도 누나와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사람이라곤 누나와 나뿐인 도서관 자료실에서 한동안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데, 의자가 밀려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누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는게 보였다. 거의 본능적으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얼마되지 않는 장서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던 누나의 표정이 조금 더 심하게 변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장서 뒤편으로 다가가 몸을 숨겼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던 누나의 등 뒤로 자료실 문이 열렸다. 왠지모를 안도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자료실 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았다.





# 대면!

‘수혁이는 그렇다 치고, 저 공부랑 담쌓은 것 같은 두 놈은 이 시간에 도서관엔 왠일이지?’

자료실 문을 통과하고는. 마치 제 집인양 테이블 위에 터억하고 앉는 세 사람을 나는 몰래 훔쳐봤다. 그러면서도 쉬이 풀리지 않은 의문에 대한 답을 내려 스스로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도대체 저놈들이 왜.

한동안 자리에 앉아있는가 싶더니, 수혁이가 먼저 일어나서는 누나가 있는 데스크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는게 보였다. 무슨일인가 싶어 장서가 쌓인 책장뒤에 숨어서 유심히 지켜보려는데, 진수와 재훈이 녀석도 갑자기 일어서서는 내가 서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기에 놀라서 잰걸음으로 몸을 다른 곳으로 숨겼다.

“야 그나저나, 졸라 이쁘지 않냐?”
-저기 수혁이 앞에 누나?

몸을 웅크린채 숨을 죽이고 있노라니, 진수와 재훈이 녀석이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덩치가 산만한 진수녀석이 속닥거리는게 여간 웃기는 일이 아니었지만, 두 녀석의 입에서 누나의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나는 이야기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예전부터 몇 번씩 보곤 했는데, 와~ 씨발 진짜 존나 예쁜거 같다.”
-예쁘긴 한것 같애. 근데 수혁인 저 누나 앞에서 뭐 하는거야?

고맙게도 내가 궁금해 하는걸 찐따같은 재훈이 녀석이 물어준 탓에, 속이 조금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보나마나, 또 이빨까는거겠지. 저 새끼 얼굴반반한 년들만 보면 한번씩 들이대잖아. 큭.”
-하긴 수혁이는 잘 생긴데다가, 말주변도 좋으니까.
"새끼야.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미쳤다고 저런 새끼랑 어울리겠냐? 다 씨파 콩고물이 떨어질만 하니까 어울리는거지.“
-큭, 그건 그래. 전교에서 싸움 제일 잘하는 네가 수혁이랑 어울리는 거 보고 의아해 하는 애들 졸라 많았잖아. 와. 저기봐 저기봐. 저 누나 웃는다.

재훈이가 속닥거리길래, 나는 숨을 죽이고 누나와 수혁이가 있는 곳을 훔쳐봤다. 아니나 다를까, 수혁이가 무슨 말인가를 쏟아내고 있고, 누나는 그 앞에서 연신 싱글벙글 웃어대고 있다. 무슨 얘기를 저렇게 재미있게 하는걸까? 조금씩 답답해지기 시작한다.

“아 씨발년. 존나 따먹고 싶다.”

애석하게도 나는 ‘따먹다’ 라는 말이 정확히 무얼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진수가 누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는 것과,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씨발년’이라는 단어를 통해, 그것이 그닥 좋은 의미가 아니겠거니 하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조금 불쾌해져서, 자세를 고쳐잡는데 진수와 재훈이 녀석이 허겁지겁 테이블쪽으로 걸어가는게 보였다. 한숨 돌리고 여전히 숨어서 그 상황을 지켜보는데, 수혁이 녀석과 누나가 나란히 녀석들에게 다가가는게 보였다.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그냥 물끄러미 그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너희 제일고등학교 다닌다면서?”
-네.. 네...
“우와 신기하다. 내 동생도 거기 학생인데.”
-우와 진짜요? 이름이 뭔데요?

안돼 누나.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마. 그냥 이유는 설명하기 힘든데, 왠지 누나는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제발 아무말도 하지마.

잔득 다급해진 나는 들리지 않을걸 뻔히 알면서도 누나를 향해 마음속으로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제발 아무말도 하지 말아줘 누나.

“아참. 컴퓨터 고장났나봐요?”
-음?

내 바램이 통한건지 어쩐건지, 재훈이 녀석이 누나의 입을 가로막고 나섰다. 언뜻보기에 진수 녀석 표정이 잔득 굳어지는것 같았다. 정말이지 다행이다 싶었다. 다시 집중을 해서 얘기를 들어보니, 검색 컴퓨터 전원이 나간 모양이었다. 구실좋게 도서검색 컴퓨터가 한대 있기는 한데, 아무래도 시골이다 보니 이 시간대에는 가끔가다 한번씩 전원이 나가거나 하는 일이 있기는 했다.

“아. 가끔 이러거든. 잠시만.”

누나가 자신의 옆에 서 있던 수혁이를 지나쳐 검색 컴퓨터 앞에 다가가 섰다. 모니터를 살펴보려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약간 뒤로 수욱 빼내는데, 아뿔싸 그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세 놈의 시선이 일제히 누나의 잘록한 허리와 적당히 볼륨감 있는 히프에 고스란히 다가가 박혔다. 누나의 하체에서 좀체 시선을 거둘 생각이 없는듯 세 녀석은 그 자리에 서서는 누나의 엉덩이를 이리저리 훔쳐봤다. 그 중에서도 반쯤 눈이 풀린듯한 진수의 표정이 단연 압권이었다. 게다가 누구 할 거 없이 하나같이 바지 앞섶이 부풀어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부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더 화가 나는건, 이런 상황에서 좀체 몸을 움직일 수 조차 없는 나 자신이었다.

잠깐 상황을 지켜보던 세 녀석이 조금씩 누나의 곁으로 다가가는게 보였다. 지금이라도 나갈까? 사람을 불러야 하나?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중에서도 단연 바지앞섶이 보기좋게 부풀어 있는 진수 녀석이 성큼성큼 누나의 엉덩이 쪽으로 몸을 밀착하는게 보였다. 고개를 돌릴만도 한데, 컴퓨터에 정신이 팔려있는 누나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다. 그래 누나와 나의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집중력.. 저거 하나. 근데 하필이면 왜 지금.

정신없이 컴퓨터 모니터를 살피고 있는 누나의 뒤에 진수 녀석이 자신의 중심부를 밀착한채 조금 상기된 얼굴을 치켜 드는게 보였다. 수혁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진수와 누나를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었고, 재훈이 녀석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아 미안, 간혹 이런날이 있어. 도서검색 컴퓨터가 먹통이네. 혹시 찾으려는거 있니? 내가 대신 찾아줄게”

누나가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제서야 진수 녀석이 황급히 누나의 곁에서 떨어진다. 이제라도 다행이라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후우.



# 안좋은 예감


녀석들이 자료실을 빠져 나간건, 자료실이 문을 닫는 9시 30분쯤 이었다. 아까 그 일 이후에도 녀석들은 한차례씩 번갈아가며 누나에게 자신들이 찾는 도서를 말한뒤 -찾는 도서는 실로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책들이었다- 책을 찾고 있는 누나의 뒤쪽으로 다가가, 아까 진수가 누나에게 했던 행동을 똑같이 반복해서 저질렀다.

한참을 숨죽여 있던 나는 땀을 닦아내며 조심스럽게 누나쪽으로 다가갔고, 누나도 어쩐지 조금 피곤해 보이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애써 웃어보이자, 누나는 더 이상 내 얼굴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10시가 되어 나와 누나는 도서관을 빠져 나왔다. 누나는 누나대로, 그리고 나는 나대로 정말이지 피곤한 하루였다. 도서관에서 나와 얼마간 걸어가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우리 둘 사이에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이런 적막을 먼저 깬건, 역시나 누나였다.

“아참, 혹시 아까 자료실에 있던 남자애들 봤어?”
-아.. 아.. 아니..?

역시나 물어온다. 아는 얼굴이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우리 인호랑 같은학교 다닌데. 그 아이들이랑 혹시 친구 아닐까 했지.”
-그... 글쎄...
“모르는 얼굴?”
-그.. 그게..

누나한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중얼거리고 있는데, 눈 앞에 낯익은 얼굴 3개가 나타났다. 덕분에 자리에 멈춰선 누나와 나, 그리고 상대편의 세사람은 모두 그 자리에 보기좋게 얼어붙고 말았다.






“와~ 설마설마 했는데, 너희들 우리 인호랑 친구였구나!”

누나가 날듯 기뻐하며 말하고 있는걸 나는 잠자코 들었다. 그냥 묵묵히. 누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친구’라는 말에 괜시리 신경을 곤두세우고선 눈앞의 수혁이 일행의 눈치를 살폈다. 얼굴을 보아하니, 수혁이 녀석들도 적지않이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잠시동안 무슨 생각인가를 하고 있던 수혁이가 선뜻 입을 열었다.

“네. 인호랑은 같은반이구요. 저희들도 놀라긴 마찬가지네요. ‘친구’ 면서도, 인호 녀석이 자기 얘기는 별로 하질 않아서, 인호한테 누나가.. 아니 이렇게 예쁜 누나가 있는줄 몰랐거든요”
-에? 너 정말 아까부터. 호호

잿빛좋게도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수혁이를 나는 빤히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마법의 주문인양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친구’라는 한마디는 다시금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수혁이의 말에 어딘가 홀린사람처럼 연신 맑게 웃는 누나의 모습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게다가 멀뚱멀뚱 서 있는 진수와 재훈이는 수혁이의 옆에서서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히죽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럼 조금 늦긴 했는데, 어디가서 간단하게 식사라도 할래? 누나가 밥사줄게”

누나의 말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아차 싶은 생각에 고개를 돌려 수혁이 일행의 표정을 살피자니, 이미 상대편의 대답은 정해진듯 보였다.

“시험 기간이라 바쁘긴 한데, 마침 금요일이구. 게다가 우리 인호 누님이 사주시는거라면 감사하게 먹어야죠!”





# 일단 집으로 가지요.


누나옆에 꼼짝없이 붙어서는, 길거리를 헤매듯 돌아다녔다. 동네가 동네 인지라, 대부분의 분식집이나 -그나마도 얼마 없지만- 음식점들은 생각보다 일찍 문을 닫는다. 슬쩍 시간을 살펴보니 벌써 11시를 넘어가고 있다. 곁눈질로 수혁이를 바라보니, 누나의 왼쪽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붙어서서는 연신 누나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누나가 착한건지, -내가 듣기엔 그닥 재미없는 이야기건만- 누나는 수혁이 녀석이 내뱉는 말에 일일이 환하게 웃어보였다. 배알이 꼴려서 슬쩍 뒤를 바라보니, 누나의 뒤를 따라걷고 있는 진수와 재훈이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들의 시선은 일제히 누나의 엉덩이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름 용기를 내어- 녀석들을 째려보았지만, 역시나 소용이 없었다.

“배 많이 고프지? 미안해서 어쩌지?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분식점이 다 문을 닫았네. 배 많이 고프지?”
-후우. 예쁜 누나 앞에서 거짓말은 못하겠네요. 솔직히 조금 고프긴 하네요.
“아. 미안 미안. 어떻게 하나?

얘들아. 배고프면 이제라도 집에 가면 된단다. 염치가 없는건지 눈치가 없는건지, 아님 둘다 없는건지. 도통 수혁이 일행은 사라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때 갑자기 누나 옆에 서 있던 수혁이 녀석이 누나에게 큰 소리로 소리쳤다.

“누나! 혹시 댁에 라면 있나요?”
-라면?
“네. 되게 염치 없는건 알지만, 솔직히 배도 조금 고프고, 더 움직여봐야 음식점도 없을것 같고. 댁에서 라면하나 끓여 주셔도 되게 감사할것 같은데.”

수혁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기본적인 예의를 아는 놈들이라면, 그따위 소리는 입밖으로 내는게 아니리라. 하지만, 누나의 생각은 나와는 조금 ‘다른듯’ 보였다.

“라면이야 있지. 그런데 너희 정말로 그거면 괜찮겠어? 아무리 그래도 라면이라니.”
-당연히 괜찮죠!!! 예쁜 누나가 끓여주시는 라면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결국 상황은 조금씩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잔득 당황한건 역시나 나였다. 도무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어떤 건지 좀체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저 어느덧 5분거리에 근접한 누나와 나의 집까지 걸어가면서, 입술을 깨물고 또 깨물 뿐이었다.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누나가 내 귓가에 살짝 속삭였다.

“누나 너무 행복해. 왜 말 안했어? 우리 인호한테 이렇게 ‘멋진’ 친구들이 있다는거”

애석하게도 누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두마디 단어는 모두 틀린 단어다. 그러니까 누나와 나의 곁에 있는 이 녀석들은 결단코 ‘멋지다고 하기에도’, 그렇다고 ‘친구라고 하기에도’ 뭣한 녀석들이다. 다만, 정말이지 어린애처럼 웃고 있는 누나의 얼굴 때문에,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누나에게 유일하다시피하게 걱정이랄까 아픔이랄까, 그런 것들을 줬던건 ‘친구가 없다’라는 점이었다. 중학교 때는 정말이지 내내 맞았다. 몸도 허약했을뿐더러, 그때는 지금처럼 공부도 그럭저럭 잘하지 못했던 터라 일진 녀석들에게 나란 존재는 딱 좋은 먹이감이었다. 친구? 친구라. 그런건 언감생심 꿈도 못꿨다. 지금이야,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별반’ 달라진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누나로썬, 지금 상황이 좋긴 좋은 모양이다. 피곤할텐데 연신 수혁이 녀석에게 연거푸 웃어주는 누나라니. 후우. 아무래도 잠자코 있어야겠다.

“다 왔다!! 저기가 우리집이야! 다들 배 많이 고프지?”
-아. 저기에요? 오. 인호가 사는곳이 저기였구나. 의외로 우리집이랑 가까웠네? 아참. 재훈아!!

집앞에 다다른 ‘녀석들’은 각기다른 감상평을 짧게 쏟아냈다. 하지만 그마저도 잠시, 수혁이가 누나의 뒤를 따라 걷던 재훈이 녀석을 불러세우더니 조곤조곤 무언가를 분주하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누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영문을 몰라 수혁이와 재훈이 녀석을 바라보는데, 재훈이 녀석이 어디간다는 말한마디 없이 어딘가로 쏜살같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친구집에 처음으로 오는건데, 빈손으로 들어가기 그래서요. 잠깐....”
-에? 너희들도 참. 그런거 신경 안써도 되는데, 어서 저 친구 다시 돌아오라고 해.
“에이, 그러지 마세요 누나. 저희도 기본적인 예의는 알아요.
-너희들도 참 호호.

기본적인 예의를 아는놈들이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 남의 집에 이렇게 들이닥치냐. 거절하지 못하고 그냥 웃어보이는 누나가 오늘은 조금 야속해 보인다. 거절을 했어도 진작에 했어야 하는데. 한숨을 한번 쉬다가, 나는 누나의 손에 이끌려 수혁이와 진수 녀석과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조금만 기달려~ 누나가 맛있는 라면 금방 끓여줄게. 파랑 계란도 넣어서.”
-천천히 하세요~

누나를 보며 싱긋 웃어보이는 수혁이 녀석이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좁디 좁은 방에 남자 두명이 앉아있으려니, 공간이 조금 비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이 진수 녀석마저 내 옆에 다가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곤 누나의 눈치를 살피며 조곤조곤 속삭였다.

“야. 니네누나 존나 예쁘다?”
-야. 하지마.

능글능글 웃어보이며 내게 말을 건내는 진수 녀석을 수혁이 녀석이 견제한다. 조금 언짢은 표정으로 수혁이를 올려다보던 진수가 이내 고개를 훽 돌려버렸다. 평소에 나에게 말한마디 걸지 않던 진수 녀석이 말을 걸어왔다는 사실에 놀라기 보다는, 나를 향해 싱긋 웃어보이는 수혁이 녀석의 속내가 무엇인지를 모르겠어서 답답할 지경이다.



“자. 여기 라~면. 밥도 많이 있으니까, 부족하면 여기다가 말아먹구.”
-와 맛있겠네요. 잘 먹겠습니다.
“그나저나, 아까 간 친구는 아직 안왔네. 같이 먹어야 할 텐데.”
-신경쓰지 마세요. 나중에라도 ‘같이 먹으면’ 되죠.

누나를 향해 싱긋 웃어보이는 수혁이 녀석이 유독 ‘같이 먹으면 된다’ 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한다. 어쩐지 깨름직하긴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아이들과 함께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라면을 한두젓갈 목구멍 뒤로 넘기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면 한젓가락을 입에 넣고 있던 누나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현관쪽으로 달려갔다. 아무래도 재훈이 녀석이 왔나 보다. 현관쪽으로 달려가는 누나를 바라보는 수혁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베어나온다.

“후우, 하아, 하아. 근.. 근처에.. 하아.. 하아. 슈퍼가 하아... 없어..하아..”
-숨이라도 좀 돌리고 얘기해라.

커다란 비닐 봉투 두 개를 손에 든 채, 숨을 헉헉 거리는 재훈이를 바라보며, 수혁이가 한마디를 쏘아 붙였다. 그제야 손에 들고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닐 봉투를 둔탁한 마찰소리와 함께 책상에 턱 하니 올려놓는 재훈이었다. 나는 내심 ‘그게 뭘까’ 궁금해져서 비닐봉투만 빤히 쳐다보았다. 슬그머니 재훈이 옆에 서 있는 누나를 올려다보니, 누나도 은근히 궁금해하는 눈치다. 그런 누나의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재훈이 녀석이 헛기침을 한번 하며 -동시에 수혁이의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비닐봉투 쪽으로 다가갔다.

“친구네 집에 처음올 땐 역시나 이게 있어야죠! 참이슬!!!”
-어머....
“어.. 머? 아니면.... 카.. 카스...”

재훈이가 비닐봉투를 거두어내자 나는 질색할 수 밖에 없었다. 찰나의 순간이라 새어 보지는 않았지만, 얼핏 보기에도 적지 않은 양의 소주와 맥주가 봉지 한가득 담겨 있었다. 누나의 나지막한 탄식 소리와 함께, 뒤이어 집안가득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깬 것은 다름아닌 수혁이었다.

“야 임마. 아무리 엉뚱하다지만, 친구집에 처음오는데 기껏 술을 사오면 어떡하냐?”
-아니.. 임마.. 나는 그게..
“것보다 교복 입고가서 술은 또 어떻게 사온거야? 저번처럼 아버지가 술 심부름 시켰다고 하고선 가지고 온거야?”
-아니.. 그러니까 그게...

수혁이 정색을 하고 재훈이 녀석을 나무라자, 어쩐지 재훈이 녀석이 -마치 억울하다는 듯- 얼굴 한가득 인상을 구겨낸다. 그런 재훈을 애써 무시하는 듯 싶더니, 수혁이 녀석이 재훈이 놈을 밀쳐내고 누나의 곁으로 다가갔다.

“누나 놀라셨죠? 죄송해요. 재훈이 녀석이 조금 엉뚱한 구석이 있어요. 대신 사과드릴게요. 죄송해요”
-아? 아 호호. 아니야. 솔직히 조금 놀라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등학생이 술이라니.
“에?~! 고등학생이 술이라니요~. 너무 애들 취급하시는거 아니에요?”
-애들 취급이라니. 호호. 아직 애들이지. 너흰.
“너무 하시네요. 요즘엔 저희 또래애들 거진 다 술 한잔씩 해요. 아 맞다. 저기 앉아있는 누나 동생, 인호도 술 곧잘 하는걸요?~ 그지 인호야?”

뭐? 술? 곧잘? 뭘? 내가? 태어나서 술 따위 입에 대본적도 없어 임마.
수혁이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오자, 나는 잔득 벙찐 표정으로 수혁이를 올려다봤다. 나만큼이나 놀랐던지, 말그대로 놀란 토끼눈의 누나와 눈이 마주쳤다. 누나와 내가 동시에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진수 녀석이 갑자기 캔맥주 하나를 따서는 -거의 강제로- 내 입속에 구겨넣었다.

“꿀꺽. 꿀꺽...”
-봐요~ 인호 잘 마시잖아요. 뭐야. 누나 표정은 왜 그래요? 혹시 인호가 그런 얘기는 따로 안했어요?

할 리가 있겠냐? 술을 아예 마신적이 없는데. 거부하고 싶은데, 내 목덜미를 잡고 있는 진수의 두터운 악력 때문에 맥주캔이 들린 진수의 손을 외면할 수가 없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꿀꺽 꿀꺽 소리를 내며 목구멍 뒤로 흘러들어오는 갈색의 액체를 쉼없이 넘기는것 뿐이었다.

“켁.. 켁.. 콜록”
-인.. 인호야.. 괜찮...
“자~ 보셨죠? 누나도 그러지 말고 앉아서 한잔 하세요. 설마 누나도 술 못한다고 ‘거짓말’하고 그러시는건 아니죠?”
-응? 아.. 그.. 그게.
“자 앉아요. 빨리. 누나는 특별히 소주~”
-소.. 소주? 아니 난, 술 잘 못 마시는데...

진수 녀석이 내 목덜미를 놓아버린건, 내가 그 녀석의 손에 들린 캔맥주의 절반 정도를 목구멍 뒤로 넘긴 뒤였다. 아 쓰다. 게다가 차갑긴 또 왜 이렇게 차가운건가. 금방이라도 토악질을 지려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헛기침마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옆에 앉아있던 진수 녀석이, 누나의 눈치를 살피며 그 거친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었다. 겨우 맥주 반모금을 마셨을 뿐인데, 정신이 어질어질해 져서는 본능적으로 진수와 수혁이 녀석의 눈치를 살폈다. 어느샌가 수혁이로부터 소주잔을 받아들고 있는 누나의 모습이 흐릿하게 눈에 들어왔다. 누나가 나를 보며 -어쩐지 조금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다시금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들자, 수혁이 녀석이 쏜살같이 누나의 손에 들린 잔에 소주를 부어버렸다. 속이 조금 매스꺼웠지만, 옆에 앉아있는 진수 녀석이 다시금 나에게 캔맥주를 권하는 -사실은 강제로 쥐어주는- 탓에 할 수 없이 달갑지 않은 맥주캔을 손에 집어 들었다.



“건배!!!”

벌써 몇 번째 건배가 왔다갔다 하는건지 모르겠다. 머리는 뜨겁고, 속은 매스꺼우며, 지구는 나를 중심으로 잘도 돌아가는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았다가 살포시 뜨면, 내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진수 녀석과 수혁이 녀석, 그리고 누나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빙빙 돌기 일쑤였다. 애써 정신을 집중해서 눈을 치켜뜨니, 내가 주저앉아 있는 자리 바로 앞에 맥주캔 3개가 널부러져 있는게 보였다. 맙소사. 내가 어느새 저걸 다 마셨단 말인가?

“얘.. 얘들아.. 끅. 누나.. 이제 그만 마셔야겠다. 끅”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누나? 이제 시작인데요~
“아니. 그게 아니.. 끅. 사실 미안한데, 이제 끅 시간도 너무 늦었고, 부모님들께서 끅 걱정도 하실거고..”
-에이~ 저희 엄마 아빠 그런걱정 안하세요. 걱정 붙들어 매시고, 우리 누나 왜 이러실까? 아 술이 떨어졌구나!! 자 제 잔 한잔 받으세요!!!
“아니.. 난 정말 더.. 끅”
-어.. 어.. 술 흘려요.. 술~~.. 얘들아 뭐하냐~?! 쭉 쭉 쭉쭉 쭉 쭉 쭉쭉, 쭉쭉쭉쭉 술이들어간다~.....

다리에 힘이 풀린채, 그리고 눈도 풀린채,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저 웃음만 나온다. 고등학생 애들이 술을 사와서는, 성인 여성한테 술을 권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그리고 -미안해 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데- 그런 놈들한테 미안하다 하며, 결국엔 손에 들린 소주를 다시금 입안으로 털어넣는 누나의 모습에 기가찰 노릇이었다. 기어이 소주 한잔을 다시금 목구멍으로 받아넘긴 누나의 얼굴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진다. 이미 잔득 술에 취해서 미간 사이에 가득 주름을 구겨넣고 있던 차에, -나의 눈에 그 가지런하던 긴 생머리가 심하게 흐트러진채- 누나의 고개가 슬금슬금 수혁이 녀석의 어깨에 기대어 지고 있는게 보였다. 수혁이 녀석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는가 싶더니, 자신의 오른손을 척하니 들어서 누나의 젖가슴 위로 손을 가져다 대는게 아닌가? 조금 화가 나서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내 바램과는 정 반대로, 나의 눈이 서서히 감키더니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참사.


“야 죽인다.”
-남매가 쌍으로 술이 약하네. 소주 조금 마셨다고 그대로 고꾸러지는 꼴이라니

내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때, 방안가득 익숙한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오고가고 있었다. 속이 매스껍고 덕분에 숨쉬기도 여간 쉽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조금조금씩 눈을 떠 나갔다.

‘왜 이렇게 어둡지?’

눈을 겨우 떴을때, 새까만 어둠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 잠이 덜 깼나 싶은 생각에 몸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몸이 마음대로 말을 듣질 않는다. 속은 매스껍고 머리는 아파오고, 태어나서 이렇게 몹쓸 기분은 처음 느껴보는것 같다.

“야. 스마트폰에 후레쉬 있지? 후레쉬좀 켜봐.”
-어.. 알았어 잠깐만.
“아니야 그러지 말고, 저기 있는 스탠드를 켜자.”
-아. 차라리 그게 낫겠다.

정신이 아찔한 상태에서도, 후레쉬를 찾는 목소리의 주인이 수혁이라는 것 쯤은 알 수 있다. 그나저나 후레쉬든 스탠드든 뭐라도 좋으니까 불좀 켜줬으면 좋겠다. 일단 정말 답답하단 말이야.

“팟”

방안에 옅은 불빛이 깜박이는가 싶더니, 내 스탠드가 밝게 켜져 방안을 비춘다. 이제야 겨우 사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게되었다는 안도감도 잠시, 수혁이 녀석들이 거의 동시에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통에 나는 벽에 몸을 기댄채 서둘러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리고 몇 분 뒤, 등뒤로 흐르는 식은땀의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는 감촉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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